공대생

응답하는 인간, 최용준 저

본 글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글은 한동 대학교 교양과목 기독교 세계관 2016년도 2학기 서평입니다.

제목 : 메이데이, 메이데이

 

어느 당신에게 특별한 메일이 찾아온다. 당신은 곤경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그런 당신에게 찾아온 메일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메일이다. 당신은 최소한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m'aider 'm'aider 긴급 신호음을 외치며 자신을 도와달리는 발언을 있다. 번째로 나의 일에는 상관 하지 말라 당신은 나에게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기독교 철학자는 우리를 응답하는 인간이라고 정의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을 위와 같은 상황으로 가지 반응을 보일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지만 우리가 매우 유한한 존재이므로 응답하는 방법에 대한 회의론에 빠질 있다. 그런 인간이 응답하는 방법은 바로 세계관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 세계관을 생각하면 동물이 바라보는 세계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들을 비교한 과학책이 생각난다. 세상의 사물은 고정적이지만 충분히 다르게 바라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유의지가 더해진다면 관점이라는 것이 생성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계관이란 단어에 대한 교육을 정확히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매스 미디어와 여러 가지 교육을 통해서 은연 중에 교육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인 시선과 교육이 중요하다. 창조에 대한 이해와 세상의 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세상을 관통하는 시선 없이 바보 상자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매한 사람과 무엇이 다를 생각한다.

정확히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였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창조이다. 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발견이다. 창세기에 쓰인 창조라는 단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히브리 단어 바라에서 것을 배웠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을 원하셨다. 그래서 자연계의 법칙을 통해 있는 일반계시와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주셨다. 창조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우리의 범죄로 인해서 균형이 파괴되었다. 완전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우주로 변화한 것이다. 불순종의 출발은 죄가 없던 세계에 오염을, 종들끼리도 생태적인 균형을 가졌던 세계를 흔히 진화론 자들이 항상 말하는 먹이사슬처럼 보이는 여러 질서들을 만들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타락한 피조물로 인하여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구속이 찾아온다. 어느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찾아온 차압 딱지에 당신은 갚을 능력이 없다 그런데 빚쟁이에게 3자가 아무런 조건 없이 빚을 대신 갚아주었고 모든 조건으로 해방되어진다. 구속. 구원과 속량. 모든 것을 되돌릴 없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의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빚을 지불하는 . 심지어 이해 관계적인 사회에서도 불가능한 비합리적 지불은 세상 사람들이 많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과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조건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here and now.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 부여 있을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우리 가운데에 있다. 나는 화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화는 과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지만 동시에 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세계관과 많은 철학적 세계관(존재론적이고 관념론적인) 대립되는 관계이다. 존재론에 대해서 생각을 포기하며 모든 기준이 자신이 되어진다. 우리의 타락 과정 가운데 모든 관점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던 조화로운 시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모든 가치와 모든 사상이 자기 중심적이 되어진다.

글을 요약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보았다. 우리는 종교적인 염원을 가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과 고민에 빠져서 세상을 살아간다. 마치 long distance 빠진 연인 관계처럼 가장 가까이 옆에서 보이는 사소한 것에 빠지게 되어진다. 가장 자신에게 노출이 쉽게 되어지는 사물들을 숭배하기 시작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평안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여러 가지 고민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성품들은 하나님께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때로는 뒤흔드는 사탄 마귀의 존재에 의해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열매를 갉아먹는 해충적인 요인이 된다. 그래서 열매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바이러스에 빠지게 된다.

고등학교의 나는 목회자의 자녀로서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모든 나의 삶의 목적은 단순히 나를 위함이었다. 내가 대학을 가는 목적은 나와 부모님이 존경받는 것을 원하였던 것이고 그렇지 않게 된다면 나는 망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였다. 내가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모든 것이 완전해 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나의 생각도 잠시 나의 모든 것은 수능에서 무너졌다. 스스로 쌓아올렸던 바벨탑은 나의 스스로 무너트렸다. 수능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쳤던 시험은 망했다. 수치적인 자질이 얼마나 검증적인 모르겠지만 전교 2등이었던 나에게 모든 것은 고난과 같았다.

하나님의 인도로 학교에 들어왔다고 인정을 하기 전까지 모든 생활이 고난이었고 절망에 빠졌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었다. 면접 받았던 말씀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3:5) 하나님은 나와 관계하시길 원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길 원하였다. 그걸 발견하기 위해 나를 here and now 지금 이자리에 보내심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청지기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평생을 ccc 간사로서 사역을 하였다. 우리집은 언제나 여유롭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우리집은 선교사 숙소를 운영하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다시 읽고 생각하였다. 부모님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동대학교에 들어와 학문과 신앙의 연결을 배웠고 세상을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지에 대해서 배웠다. 나는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고 여겼고 삶에서도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삶을 간증하게 되었고 한동나눔간증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나는 과정론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내가 장학금을 받았다는 결과값 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되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였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에서 소교리 문답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있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 받는 사람도 일종의 관계이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로봇과 같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응답은 메이데이로 끝나지 않는다. 가장 안전한 탈출과 장소로의 인도에 감사하다는 것이 응답하는 인간으로서의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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